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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on Harry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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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가진 모든 것으로, 이해를 구하십시오.
돈 D. 해리먼
원전출처 <특별한 사람들: 몰몬
그리고 동성애>
저는 교회에서
자라진 않았지만 고등학생시절
친구로부터 교회를 소개받았습니다. 비슷한 시기에
저의 부모님은 이혼하셨고,
저는 제 삶에 관심을
가져주신 한 몰몬 가족들과
함께 살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연관뿐만이
아니라, 몰몬교의
교리가 신성한 것이라는
저 자신의 확신 때문에 저는
열여섯살에 침례를 받았습니다.
침례 이전의
제 삶에서, 항상 제가 남과 다르다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침례 전의 인터뷰에서
저는, 항상 막연히
의심했으나 결코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던 제 자신에
관한 무언가-제가
어쩌면 동성애자일지도
모른다는 것-에 대해
질문을 받았습니다. 저는 침례 받기에 합당하지
못한 어떤 성적 경험도 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 질문은
여지를 남긴 채 지나갔고,
저는 머리에서 그것을
떨쳐버렸습니다.
저는 몰몬
교회에 가입하기 전에 어떤
종교적 교육 내지는 관련
활동을 가져본 적이 없었고, 저는 새롭게
발견한 신앙심을 열정적으로
끌어안았습니다. 저는
교회 모임들, 청년활동들,
그리고 이른 아침 세미나리에
참여하는 것에서 대단한
만족을 얻었습니다. 교회에 열띠게 몰두하였고
교회가입 이전에 어떤 성적
경험도 없었으므로, 저는 다시 고개를 드는
성가신 그 의구심에 대해
완전한 대답을 하지 못했습니다-사실 저는 그 질문을 이해하지도
못했는데, 동성애자가
무엇인지도 정말 몰랐기
때문입니다. 저는
제 두려움을 감독님께 고백하고
안심하였습니다. 제가
해야 할 것은 여학생들과
계속해서 데이트하고,
교회 활동에 완전히
참여하고, 계명에
순종하는 것이라고 감독님께서
제게 확인하셨습니다.
그 말씀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저는
교회 활동과,
학교와, 사회 생활에
새롭게 충전된 에너지를
쏟았는데, 그런 활동들은
남학생과 여학생 모두와의
우정 도모를 포함하는 것이었습니다.
여성을 좋아하냐 싫어하냐는
문제도 아니었는데-저는 여학생들을 좋아했고
학교와 교회에서 여러 친구들을
사귀었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저와 가장 친했던
친구들은 제 누이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몰몬교의 하위문화에서
자라면서 제가 다른 소년
소녀들과 가질 수 있었던
유일한 사회적 교제는 성적이지
않은 것 뿐이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제가
남성에 대해 느꼈던 성적
감정들을 무시하고 여성에
대해 느꼈던 우정들을 굳이
성적 매력으로 해석하기는
쉬웠습니다.
1969년 가을에
저는 고등학교를 우등으로
졸업했고, 제가 진학을
고려하여 지원했던 유일한
대학교인 BYU(브리검 영 대학교)에 진학했습니다.
저는 옳은 결정이라고
느꼈습니다-확실히
그곳은 제가 원했던 삶을
준비하기 위해 가장 좋은
곳이었고, 처음 일년
동안 실제로 정말 좋았습니다.
강의, 사교활동,
학교내 학생 와드에의
참여가 모두 즐거웠습니다.
혹여 동성애적 감정에
대해 어떤 생각이라도 해봤다면
그것은 금새 사라져버릴
뿐이었습니다-저는
선교사업을 나가고, BYU대학으로
돌아와, 결혼할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일본으로의
선교봉사 부름은 1970년 가을에 왔습니다.
솔트레이크 시티에
있는 오래된 선교본부에서
보낸 첫 주동안 저희는 교회의
여러 총관리 역원들의 많은
고무적인 메시지들 중,
뉘우칠 줄 모르는 성적
죄악의 악마들에 관한 무서운
이야기들을 들었습니다.
제 스스로 거의 말하지
못했던 그 단어가 몇 차례
반복되었습니다. 우리는
경고받기를, 동성애는
더할나위 없이 사악한 것이며,
회개하지 않는 사람은
누구든 영적 어두움과 실패로
가득찬 선교사업을 하게
될 운명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분들이 옳다고
확신했으며, 쿵쾅거리는
가슴으로 선교부장님께
면담을 요청했습니다.
제 고백을 듣자마자
선교부장님은 제가 가장
어두운 죄악에 연루되었다고
확신하였습니다. 그러나
저의 구체적인 경험과 제가
어울렸던 사람들에 관해
저를 추궁한 뒤, 그는
제가 성적 경험은 없이 단지
감정만을 느꼈을 뿐이기
때문에 제가 선교사업을
나가기에 깨끗하고 합당하다고
판단했습니다. 안심하고서
저는 가능한한 최고의 선교사가
되기로 결심하고 솔트레이크
시티를 떠나 하와이에 있는
선교사 언어 교육 센터로
향했습니다.
저는 선교사업이
정말 좋았습니다. 언어에서 두각을
나타냈고, 대부분의
제 동반자들과 친하게 지냈으며,
일본인들과 그들의
아름답고 매력적인 나라에
대한 진정한 사랑을 갖게
되었습니다. 저는
선교생활의 어떤 측면들은
선교사업 보다는 신병훈련소에서나
있을법한 식으로 경쟁적이라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때로 끊임없는
규칙들이 지나치게 심한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제 선교사업은 심오한 종교적
문화적 경험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여전히 때로 무서운 기분들이
격렬하고 거부할 수 없는
확신으로 제게 엄습해 왔습니다. 때로 저는 일부
남성들에게 강렬하고,
어쩔 수 없는, 뚜렷한
성적인 느낌들을 가졌는데-특히 제가 정서적 유대를
느꼈던 특정 교회 회원과
선교 동반자에 대한 느낌이었습니다.
여름의 어느날 밤이
유달리 기억납니다. 숨막힐 듯한 일본의 여름
더위와, 성적인 꿈과,
제 옆에서 자고 있던
동반자에게 품었던 열정으로
땀에 젖은 채 저는 잠에서
깨어났습니다. 저는
이제껏 익숙해진 패턴을
따라 제 감정들을 선교부장님께
고해했습니다. 그는
참을성 있게 들어주었지만,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분은
그 지위에 있는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가장 현명한 대처를
하였습니다: 제가
감정에 따라 행동하지 않았으므로,
처벌받을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판단과 처벌을 모두 보류하고는,
저를 사랑하며 선교사로서의
제 노력들에 감사하다고
말했습니다. 선교부장님과
그의 아내의 사랑과 후원이
제가 선교사업을 끝까지
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습니다.
1972년
11월에 저는 선교사업을
마쳤고, 제가 동성애자이며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 수
있게 저를 도울 수 있는 사람은
누구도 없다는 커지는 확신을
가지고 캘리포니아에 있는
집으로 귀환하였습니다.
6개월 동안 집에서 일한
후 저는 BYU로 돌아가기로
결심했습니다-저는 프로보에서
그 해 여름 일했고 계획을
세웠습니다. 교회
지도자들과의 반복되는
면담은 아무런 소득이 없었습니다.
다른 해결책을 찾아야만
한다는 것을 저는 알았습니다.
살면서
처음으로 저는 정신과 의사나
심리학자를 만나봐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저는 그들 사이에
차이점이 뭔지도 몰랐고,
그런 사람들이 하는
일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전혀 몰랐습니다. 하지만 점차 커져가는
공포 때문에 저는 제가 취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 듯한
그 길(상담)을
택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제가 이런 문제를
가진 유일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저는
완전히 혼자라고 느꼈습니다.
어딘가에서 BYU 심리치료
병원에 관한 것을 읽은 후
저는 익명이 보장되는 공중전화를
찾아, 도중에
끊기를 수차례 반복하다가
마침내 통화를 마쳤습니다.
전화를
받은 사람은 제게 문제가
뭔지 말하도록 하려고 헛된
노력을 했지만, 저는 그것을 도저히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몇 주 후 가을 학기가
시작될 것이고 제가 다시
전화 건다면 상담원을 만날
약속을 잡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그 후 다시 전화하였고 만날
약속을 한 날이 오기까지
계속되는 날들을 초조하게
기다렸습니다.
한 오래된 "저지대 캠퍼스"
건물에서, 저는
공포로 몸이 굳은채 앉아
약속을 기다리다 마침내
한 유쾌하고 매력적인 남자에게
인사를 받았습니다. 세션이 시작되자, 그는 자신이 심리학을
전공하는 대학원생이며
치료 상담 경험이 그의 박사학위
프로그램에 필수적인 요소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때의
세션과 그 후로 이어진 세션들에서
우리는 일반적인 주제에
관해 편안한 대화를 나눴고,
저는 제 성적 감정들에
관해 자세히 얘기하는 것에
대해 꺼렸던 것을 점차로
일부 극복하였습니다.
이 과정을 돕기 위해
최면요법이 사용되었고,
저는 제가 늘 두려워하고
결코 경험해본 적이 없으며
제 자신에 대해 전적으로
혐오하게 된 그것(동성애)에 관해
정말로 도움을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신뢰를 얻기 시작했습니다.
상담세션이
진행됨에 따라, 우리가 분석 단계에서
충분한 시간을 보냈고 이제는
치료 단계로 넘어가야 할
때가 되었다고 제 카운슬러가
지적하였습니다. 제
목적은 동성애자로부터
이성애자로 전환하는 것이었습니다.
제 상담원은 그 전제를,
많은 여러 대안들 중의
하나의 선택이라고 논한
적이 결코 없었으며, 저 역시-있는 그대로
자신을 받아들이는 것 같은-다른 대안들이 있다고는
생각해보지 않았습니다.
그는 "효과가
기대될 것"으로 드러났다는
전기충격과 성적으로 적나라한
슬라이드를 사용하는 반감요법이라
불리는 새로운 치료를 설명했습니다.
저는 그 치료가 제 자신에게
줄 수 있는 그 어떤 정서적,
육체적, 혹은 영적
손상의 가능성에 대해 짧은
고려조차 하지 않았습니다-저는 변하기로 마음먹었던
것입니다. 심리치료
병원과 BYU는 만일의 사태에
대한 어떤 책임도 지지 않는다는
서류에 저는 주저없이 서명했습니다.
(역자
주: aversion therapy는 중독
내지는 끌리는 대상에 대한
혐오감을 일으켜 그것을
벗어나게 한다는 치료법으로, 여기서는 매력적인
남성의 나체 사진을 보여주며
동시에 전기충격을 가하고
구토 등을 유발하여 괴로운
경험으로 그것에 대한 혐오감을
이끌어 동성애 성향을 벗어나게
한다는 요법이다. 영화 "Latter
Days"에는 이
치료를 받는 모습이 있어
참고할 수 있다.)
제 카운슬러는
제가 성적으로 에로틱하고, 되도록이면
나체인 남성 사진들을 구할
필요가 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전기)충격은 제가
그 슬라이드를 보는 동안
저에게 가해질 것이었습니다.
제가 그런 사진들을
어디서 구할 수 있는지는
전혀 알려주지 않았는데-어쩌면 그는 제가 알고
있다고 가정했는지도 모릅니다.
제게 차가 없었고,
제 비밀을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람들 중에서 차를
가진 사람이라곤 없어서
저는 솔트레이크 시티로
가는 차를 얻어탔습니다.
거기는 성적 나체 사진을
찾을 수 있다고 제가 생각해낸
유일한 곳이었습니다.
솔트레이크의 거리를
위아래로 걸었습니다,
마침내 외설물을 팔만큼
충분히 궁색해보이는 한
서점을 발견할 때까지 말이죠.
저는 아는 사람을 만날까봐
두려워하면서 서점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그 서점에 있는
모든 책과 잡지를 살피다가
결국 포르노 잡지들이 진열된
선반으로 다가갔습니다.
제가 고른 다른 몇 개의
잡지들 사이에, 문득
아내나 여자친구에게 주려고
고른 것처럼 가장해 <플레이걸> 잡지
두어 권을 끼워넣었습니다.
그런 잡지들을 사는
것이 어느모로 보나 무심결에
하는 일이 될 수 없었고,
그것은 제가 여지껏
살면서 본, 구입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최초의 포르노 잡지였습니다.
저는 제자리를 잃고
혼자남은 듯 느끼며 겁이났습니다.
제가 다음으로
할 일은 그 사진들을 보고
가장 에로틱하다고 여긴
것들을 골라 지방 사진관으로
가져가는 것이었는데, 심리병동에서
사진들을 슬라이드로 만들어달라고
미리 예약해뒀다는 곳이었습니다.
모든 것이 승인됐으며
그 예약에 관해 가게 주인만이
알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물론 슬라이드 비용은
제가 대야 할 것이었습니다.
저는 사진들을 평범한
마닐라 봉투에 넣어 가게로
가져갔고 용기를 모아 카운터로
가서 BYU 교수가 지도중인
프로그램을 위한 슬라이드를
만들 사진들을 가져왔노라고
말했습니다.
제말이 입에서 떨어지기가
무섭게 그곳의 직원들은
하던 일에서 눈을 떼고 저를
쳐다봤습니다. 몹시
굴욕적이고 당황스러웠습니다.
마치 그 모든 낯선이들이
저의 가장 내밀한 문제에
관해 알고 있는 듯 느꼈습니다.
실제 반감요법
치료기간은 그 후에 시작되었고
약 두어달의 방학을 제외하면
저는 다음해 내내 일 주일에
두 번씩 치료를 계속했습니다. 심리병동에
처음 전화한 것으로 시작하여
주간 방문을 계속하는 동안,
솔트레이크와 사진관으로
왕래하면서 저는 이중 생활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제 행적에 대해 비밀스럽게
처리했고, 제 치료가
다른 활동들과 겹치지 않도록
해서 남들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저는
'스미스 가족 생활 센터(Smith Family Living Center)'로 들어가곤
했는데, 그곳에서는
제 팔에 전극을 연결하고,
제게 남성과의 성행위를
돌이켜보거나 상상해보라고
요구하였습니다-그런
성적 경험은 전혀 해본적이
없었고 두 남성이 서로에게
무엇을 하는지 확실히 알지도
못했으므로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슬라이드를
보면서 불규칙적이고 고통스러운
전기 쇼크가 제 팔을 통해
전달되곤 하였습니다.
후에 그 과정이 수정되었습니다.
남성의 슬라이드를
보는 동안 전기 충격이 가해지다가,
제가 손잡이를 눌러
전기충격을 멈출 수 있었는데
그 손잡이를 누르면 화면에
옷을 입은 여성의 사진이
나타났습니다. 심지어
지금도 그 치료법의 다른
자세한 묘사는 제가 쓰기에
너무 창피스러울 따름입니다.
(이 요법에 관한 자세한
묘사는 M. F.
McBride, "Effect of Visual Stimuli in Electric Shock Therapy", 박사학위 논문, 브리검 영 대학교,
1976.에서 찾을 수 있다.)
이 치료 후 상담이 뒤따랐는데,
그 상담내용은 제가
여성들과 "육체적"
관계를 갖도록 권장하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최면요법도 이어졌는데,
그 내용은 제가 남성에
대해 에로틱한 생각을 할
경우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역한 감정을 느낀다는 주문이었습니다.
제가 남성에
대해 생각하면서 역한 감정을
한번이라도 느꼈던 적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성적인 느낌이
들 기미가 보이자마자 시선을
돌려 다른 생각을 하는 것에는
매우 숙달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제가 여성과
"육체적" 관계를
가진 적은 단 한번도 없었습니다.
데이트 했던 여성을
좋아하긴 했어도, 여성의 손을 잡거나 키스를
하는 것에 대해 오히려 전보다
더 불안해졌습니다. 게다가 어떻게 해야
"육체적" 이라는
건지 알 수 없었습니다.
제 치료를 처음 담당했던
카운슬러는 도중에
졸업했고, 학위논문의
한 부분으로서 반감요법을
다루고 있는 또 다른
대학원생이 후임이
되었습니다. 제가 혹시
겪을 수도 있는 그 어떤
부작용에 대한 어떤
법적 책임도 BYU 또는 이
실험에 연관된 누구에게도
묻지 않겠다고 치료를
시작하면서 서명하였으므로,
제 팔의 전기화상이나
제가 겪은 정신적 외상은
변화를 위해 지불해야만
하는 대가라고 생각했습니다.
손이 피로 붉어질 때까지
문을 두드리는 것에
관해 누군가가 끊임없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제 귀에서 울렸습니다.
그리고 절망속에서
저는 이 모든 고통과,
그러므로 일종의 순교자가
되는 이 경험이 제가
지금 옳은 일을 하고
있다는 추가적인 증거라고
여기기 시작했습니다.
1975년 봄에
저는 치료를 마쳤습니다.
제 동성애성향이 완치되었는지에
관한 제 카운슬러의 평가기준이
제겐 명확하지 않았지만,
마지막 몇 치료세션동안
그는 제 "진보"에 관해 긍정적으로 말하였고
또한 제가 결혼하기 원하는
여성이 곧 제 삶에 찾아올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저 또한 그렇게
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해 여름
저는 프로보에 남아 캐논
센터 휴게실에서 일했습니다. 저와 함께 일했던
몇 여성들은 그해 가을 학교에
다니기 위해 시애틀로부터
올 예정이라는 그들의 친구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제가 작은 아파트 비용을
분담할 룸메이트를 필요로
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들은 그 친구를 룸메이트로
삼는 것이 어떻겠냐고 물었습니다.
매우 좋을 것 같았습니다.
1975년 가을
학기의 시작 일 주일 전,
친구인 어느 여성과
함께 프로보까지 차를 몰고
와 헤리티지 홀에서 기다리고
있는 새 룸메이트를 만나기
위해 저는 캠퍼스를 가로질러
걸었습니다. 그를
처음 보자마자 제 가슴은
뛰었습니다. 그는
잘생긴데다, 제 아파트까지
함께 걸어 돌아가는 길에
저는 그가 참 매력적인 품성을
가졌고 재치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우리는
편하게 대화했고, 저녁식사 후 그의 짐을
푼 후에 쉬었습니다.
그와의
대화 도중에 거의 감지하기
어려울 정도로 별일 아닌
것들이 희미한 의구심을
일으켰고, 제가 불을 끈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새로운 친구는 손을
뻗어 제 팔을 만졌습니다.
단 한 번의 순수한 그
손길은 흥분할 정도로 에로틱했고
겁이날 정도였습니다.
제가 억누르기 위해
그렇게 열심히 노력해왔던
그 감정들이 미친듯 통제
불능으로 표면까지 차 올랐습니다.
제 자신에 대해 늘 두려워하고
혐오했던 것이 무기력하고
피할 수 없게 제 의식의 한
부분이 되었습니다. 저는 사랑에 빠지고 있었습니다.
신중히
쌓아올린 방어막들이 무너졌기
때문에 저는 밤새도록 잠을
이루지 못하고, 동이 터 방안에 햇볕이
들어 찰 때 자포자기적 심정으로
결정을 내렸습니다. 제 친구가, 스티브라고
부르겠습니다, 깨어났을
때 저는 그에게 동성애자가
맞느냐는 저의 의구심을
직접 드러냈습니다. 저는 제 자신의 감정에
집중할 정신적 여유가 없었습니다.
자기방어기제로서 저는
마지막으로 제가 동성애자가
결단코 아니라고 단언했습니다.
제 예상과는 달리 그는
제 추궁을 부인할 필요를
전혀 느끼지 않았습니다.
그는 오래 전에 자신의
동성애를 받아들였고 여전히
BYU에서의 학업을 마치고
교회의 선교사업에 나가기로
결심한 상태였습니다.
그 첫날
후 계속된 몇 주가 지나자
저는 제 딜레마의 중압감과
공포를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치료되지도
않았고, 스티브와
저 사이에 시작되고 있던
관계는 전에 제가 믿도록
종용된 것처럼 불결하거나
끔찍하지도 않았습니다.
사랑에 빠지는 것은
제가 결코 경험한 적이 없었던
감정들의 롤러코스터와
같았습니다. 일단
그런 감정들을 겪고 나자,
저는 다시는 예전처럼
될 리도, 될 수도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새로운 감정의 집합들이
자라났습니다-교회를
행해 느끼기 시작한 분노였습니다.
그 모든 것들을 겪었는데
왜 아직 동성애자란 말입니까?
제 생각과 가슴 속에
어떤 의심도 결코 가져본
적이 없어서 저는 그들이
이성애자가 되기 위해 하라고
말했던 것 이상을 해왔습니다.
저는 속아왔던 것입니까?
아니면 제가 자신을
기만해온 것이었습니까?
저의 화는 자라고 또
자라서, 비록 스티브가
때로 제 정신과 감정에 넘치는
그 이슈들을 정리해주기
위해 돕기는 했지만 결국
그 역시도 저의 혼란에 위압감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제 딜레마의 가장 짜증스웠던
점은 제 섹슈얼리티에 대해
교회에서 늘 배워왔던 것이
제가 실제 경험에서 알게
된 것들과 매우, 아주
많이 달랐다는 점이었습니다.
제가 스티브의
친구 하워드를 전화로 알게
된 것은 그때였습니다. 하워드는 스티브의
역할 모델이었고, 제가 이제 겪고 있던 바로
그 위기를 스티브가 겪을
당시 해결하도록 도움을
준 인물이었습니다. 몰몬 교회의 파면된 신도로서,
하워드는 동성애와
교회의 복잡한 이슈들을
정리할 수 있도록 도와주느라
여러 달 동안 저와의 전화
통화에 오랜 시간을 들였습니다.
눈 내리는 수 많은 밤에
밖으로 나가 걷다가, 생각하고, 울곤
하였습니다.
1976년 봄에
스티브는 유럽으로 선교사업을
떠났고, 저는 하워드의
집이 있는 북부 캘리포니아로
이사했습니다. 삼나무
사이의 러시안 강둑에 있는
하워드의 집에서 그해 오월
아침을 맞는 것은 마치 또
다른 세상으로 이동된 것과
같았습니다. 하워드와
그를 방문한 많은 친구들과의
든든하고 아껴주는 환경
속에서 저는 안정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정말
다양한 사람들이 방문했습니다-하워드는 모든 사람들을
알고 지냈습니다. 아이를 가진 이성애 부부들도
있었고, 독신 이성애자들도
있었고, 동성애자
커플들도 있었고, 그 해 여름과 가을에 오고
간 많은 독신들이 있었습니다.
저는 제 동성애 성향이
제 삶에서 유일한 사안이
될 필요가 없음을 이해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워드의
친구들은 그와 저의 동성애
성향을 받아들였고, 오히려 제가 무슨 생각을
하며 어떤 사람인가에 대해
더 관심이 있는 듯 하였습니다.
저는 또한 제 동성애
성향을 받아들이는 것이,
훌륭한 일과 풍족하고
즐거운 우정으로 가득찬
삶을 막지는 않는다는 것
역시 분명히 깨달았습니다.
점차 제 자신이 동성애공포증과
자기 혐오로 가득차 있었음을
알 수 있었고, 행복의
열쇠는 스스로를 받아들이는
것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워드는
제 삶을 되찾아주었습니다. 그는 제 나름의
성도덕 틀을 짜는 데 도움이
되는 많은 것들을 교훈과
모범으로 가르쳐주었습니다.
시간이 지나고 경험이
쌓이면서 이런 것들은 좀더
분명해지고 더욱 값진 것이
되었습니다. 로맨스와
성적 표현이 포함된 스티브와의
관계와 달리, 하워드와의
관계는 차라리 부자지간
관계 같은 것이었습니다.
저는 어느 관계든 사랑이
가장 중요한 요소임을 알기
시작했습니다.
하워드가
고집스럽게 주장하여, 저는 학업을
마칠 겸 또한 전해에 벗어난
제 문제들에 맞서기 위해
1977년 1월 BYU로
돌아갔습니다. 그해 6월, 아름다운 강가에 서서
그의 사랑스런 애완견과
놀아주던 하워드는 심장마비로
돌아가셨습니다. 프로보에
돌아와 있던 저는 그 소식을
듣고 참담했습니다. 며칠 후 하워드의 고향인
스프링빌에서 장례식에
참여한 후 저는 캘리포니아까지
사막을 가로질러 게른빌에
있는 하워드의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거기서
보낸 날들과 프로보로 돌아온
몇 달 동안, 저는 매우 우울했고 하워드가
없는 세상을 상상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최고의 친구였으며 제가
아는 가장 위대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를 잃은 고통을 시간이
누그러뜨리긴 했으나,
이제껏 그를 그리워하지
않은 날이 없었고 그가 제
삶에 그처럼 중요한 영향을
줬다는 것에 대해 늘 감사해왔습니다.
하워드가
죽고 스티브가 다음해에도
역시 유럽에 있는 동안, 저는 외로웠지만
친구들로부터 위안을 얻었고
학교 공부에서 새로이 만족을
찾았습니다. 하워드는
제가 학업을 마치기 위해
학교로 돌아가야만 한다고
주장했고 저는 헌신적이고
열정을 가지고 그 일에 뛰어들었습니다.
스티브는 1978년에 그의 선교사업을
마쳤습니다. 그가
프로보에 돌아왔을 때,
우리의 관계는 사춘기
시절 사랑을 거치듯 하였고
끝이 났습니다. 그는
하워드를 끔찍이 그리워했고,
1970년대 BYU의 동성애자들에게
규범이 된 억압적 분위기를
견뎌낼 수 없었습니다. 그해 가을 학기가
끝날 무렵, 그는
'어퍼메이션/게이와
레즈비언 몰몬들'이라는
새롭게 설립된 그룹에서
만난 친구들과 함께 솔트레이크
시티로 이사했습니다.
저는 스티브와
몇 차례 어퍼메이션에 참여했으나, 제가 어퍼메이션에
대해 확신을 가지지 않았던
상황에서 스티브마저 솔트레이크로
이사하자 저는 더이상 그
그룹에 참여할 수 없었습니다.
하워드가 떠나고 이제
스티브마저 떠난 상황에서
저는 완전히 고립된 듯 느꼈습니다.
제게는 많은 친구가
있었지만 제 동성애에 대해
알고 있는 친구는 단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이제껏
결코 겪어보지 못한 가장
음침한 낙담과 외로움이
밀려왔습니다.
그해 크리스마스에
저는 샌프란시스코 베이
지역에 있는 한 친구를 방문했습니다. 제가 방문했던
마지막 날 그녀는 샌프란시스코로
일을 하러 나갔고 저는 그날을
일자리를 찾으며 보내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날
대부분 길을 걸으며 보냈고,
때로 울기도 했고 때로는
무엇을 해야 할지 알게 해달라고
마음 속으로 기도하며 걸었습니다.
프로보에서의 제 삶은
견디기 힘들었고 저는 되돌아갈
엄두를 내지 못했습니다.
아마도 여기 와서 일자리를
얻어야 겠다고 저는 생각했고,
실제로 두어 차례 인터뷰를
가졌습니다. 그 겨울
날이 끝날 무렵 저는 마지막으로
샌프란시스코 시청에 들러봤습니다.
잠시 동안 저는 제 골칫거리들을
잊고 로코코 양식의 시청
건물의 호화로움을 바라봤습니다.
그리고 나서 인력부서가
있는 지하로 갔습니다.
계단의 마지막을 막
내려갔을 때, 저는
따뜻하고 행복한 기분에
휩싸였고 무엇을 해야할
지 알았습니다. 그
인상은 매우 명백한 것이었는데,
제가 프로보로 돌아가
지금은 선교사 교육 센터(MTC)라고
불리는 선교사 언어교육원에
지원했던 그 일자리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프로보에
있는 제 친구들이 저를 염려한다는
것을 알았고, 선교사들이
저를 필요로 한다는 것을
알았고, 저도 그들이
필요했습니다. 그
인상은 실제로 들어맞았습니다.
제 친구들은 제가 말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이해하지
못했지만, 어쨌든
그들은 제 결정을 환영했습니다.
또한 MTC에서 일본어를
가르친 14개월 동안, 저는
제 선교 경험과 언어 능력을
선교사들과 나눴습니다.
아낌없이 봉사하는
것이야 말로 제가 얻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약과도
같았습니다. 그 어려웠던
시절을 그덕분에 견뎌낼
수 있었습니다.
1979년 가을에,
학업을 1년 남기고,
저는 BYU에서의 최후의
위기에 봉착했습니다. 예전의 룸메이트가
저와 스티브의 관계를 알아내고는,
제가 가르치던 선교사들을
위험에 빠지게 한다며 저를
고자질하였습니다. 그 주 일요일 아침에 저는
감독님과 마주했을 때 거의
히스테리적으로 되었습니다.
BYU 보안당국이 보유한
동성애자로 의심되는 사람들에
대한 목록과,
유도심문 및 함정 등에
관해서 저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저는 매우 두려웠습니다.
스티브와
관련된 제 이야기를 전부
다 들었을 때 제 감독님은
할 말을 잃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무슨 소릴 듣고 있는 건지
도무지 믿지 못하셨고,
자신 앞에 앉아 있는
사람이 동성애자라는 것조차
믿지 못하셨습니다. 저는 그의 고정관념이나
선입견에 조금도 들어맞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의 반응은 따뜻했고,
그는 제 상황에 대해
그와 스테이크장님과 저만
알고 있노라고 다짐했습니다.
며칠 뒤, 감독님과 스테이크장님은,
저와 스티브 사이의
일이 아주 오래 전 일인데다,
감독 지침서에 나와있는
"모반한 동성애자"의 분류에 적합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제가 BYU에 남아도
좋을 것이며 저의 교회 회원자격에
관한 어떤 불리한 조치도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처음에는 감독님과
스테이크장님 모두 저를
카운슬러에게 보내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기존의
제 경험에 비추어 볼 때 저는
무서워졌습니다. 그러나
그 뒤 몇 주 동안 감독님은
그 생각을 버리시고 점점
더 혼란스럽고 걱정되는
것 같았습니다. 여러
면담에서 그는 저를 어떻게
도와야 할 지 모르겠으며
이제는 와드 내에 다뤄야
할 동성애 관련 사건이 몇
건 더 있다고 털어놓았습니다.
더 나아가, 총관리
역원에게 직접 찾아가고자
했던 그의 바람은 스테이크장님에
의해 완고히 거절되었습니다.
그 시점에서
저는 제 자신의 삶에 책임을
지는 방향으로 진정한 첫
걸음을 내디뎠습니다. 마치 제 삶에
관해 저를 제외한 다른 모든
사람들이 결정짓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때까지
아직 만나뵌 적이 없었던
스테이크장님과 만나기로
약속을 정했습니다. 우리의 면담은 성의있고
진심어린 분위기에서 시작되었지만
그는 제가 동성애에 관련된
심리학 이론에 관해 많이
읽고 정통해 있자 놀라는
것 같았습니다. 실제로
그는 또한 제가 스스로의
경험에 관해 믿을만한 증언들을
하는 것에 관해서 놀랐습니다.
그가 전문가로서-그는 교육심리학 박사학위
소지자였습니다-동성애가
치료나 전환이 불가능한
상태임을 알고 있다고 솔직히
말했을 때 저의 분노와 함께
절망이 더욱 커졌습니다.
그러나 교회 지도자로서의
그의 신분때문에 그는 교회의
공식 입장을 지지해야만
한다고 느꼈습니다. 게다가, 그가 말하길,
교단에서는 동성애가
치료 가능하다고 말했던
게 아니라, 동성애자는
그 또는 그녀 자신의 감정에
따라 행동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의미한 것이었노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분노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이 문제에 관한
교회의 입장이 명쾌한 것이
아니었음이 마침내 분명해졌습니다.
그들이 전에 했던 말들과
지금 하는 말들이 실제로
서로 꽤 달랐습니다. 결국 저는 제 스스로 답을
찾아야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전에는
남은 기간동안 모든 교회와
BYU의 표준을 준수하겠다고
감독님께 동의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저는 스테이크장님께 저도
제 나름의 요구사항이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
전해에, 저의 반감요법
치료 경험에 대해 들은 어퍼메이션
소속 어떤 사람이 BYU에서의
동성애에 관한 프로그램을
제작하는 데 관심이 있는
솔트레이크 시티 공영 텔레비젼
방송국에 저의 이름을 알려준
적이 있었습니다. 비록 저는 인터뷰를
거절했었으나, 이제
저는 보안당국으로부터
괴롭힘을 당할 일말의 조짐이라도
있을 경우, 공영 텔레비젼이나
신문 또는 제 말을 들어 줄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라도
가서 제 이야기를 공론화시키겠다고
스테이크장님께 말씀드렸습니다.
스테이크장님의
얼굴이 창백해졌습니다. 그는 제가 결코
그래서는 안된다고 더듬거리며
말했습니다. 그가
물었습니다. "그럼
BYU는 어떻게 되겠니?" 저는 이 사람에게는
저보다 BYU의 대외 이미지가
더 중요한 것임을 그제서야
깨달았습니다.
제가 물었습니다. "그럼 저는
어떻구요?" 그게 다였습니다.
끝이었습니다. 저는 학위를 마칠 것이고
BYU와 프로보를 떠날
것이었습니다. 어쩌면 저는 교회마저
떠날 것이었습니다. 감독님과 가졌던 마지막
면담은 제가 절대 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눈물을
글썽이시며 그는 그와 교회가
저를 망쳐서 미안하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그 누구도 그분보다 더 큰
기독교적 관심을 가지고
저를 대해줄 수 없었노라고
그분께 대답했고 그것은
지금도 사실입니다. 감독님은 또한 총관리역원들로부터
직접 양해를 구해보고자
했던 그의 소망이 스테이크장님에
의해 거절된 것에 대해서도
사과하였습니다. 스테이크장의
행동이 기독교적 사랑보다는
행정관료적 편의에 더 가까운
하나의 예였다고 느끼는
반면 저는 정말로 그를 탓하지는
않노라고 답했습니다.
그의 신분에서라면
저도 그렇게 했을 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저는 제 학기를
마치고, 학위를
받고, 떠났습니다.
저의 삶을 찾아야 하지만
지금 있는 곳에서는 찾을
수 없다는 것이 분명했습니다.
저는 1980년 9월에 샌프란시스코 베이
지역으로 이사했습니다.
1983년 저는 어퍼메이션과
다시 연락을 취했고, 비록 처음에는 교회에
나갔지만 결국에는 저활동
되었습니다. 어쩌면
성도집단 내에는 더 큰 영적
안전이 있을지도 모릅니다만,
떠나고자 하는 저의
선택은, 거짓과 거부와
자기혐오로부터 자유롭고
싶은 저의 소망, 제
삶에 대한 책임을 받아들이고자
하는 저의 소망이 반영된
것입니다. 궁극적으로,
저를 합당하지 못하며
쓸모 없다고 여기는 곳으로
저는 다시 돌아갈 수도 없고,
다시 돌아가지도 않을
것입니다.
저는 어퍼메이션의
많은 친구들과 다른 친구
및 가족들로부터 심오한
공동체의식을 발견했고, 저 자신을 인정함으로써
모든 사람들을 포괄하는-흑인과 백인, 남성과
여성, 노인과 젊은이,
합당한 자와 그다지
그렇지 못한 자,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 동성애자와 이성애자,
교회와 사회에 딱 맞는
자와 단지 좀 다를 뿐인 자
모두를 포함하는-인간다운
가족으로의 더 큰 소속감을
발견했습니다.
6월에
저는 어퍼메이션 가족들과
샌프란시스코 동성애자
자유의 날 퍼레이드에서
함께 행진했습니다. 저는 어퍼메이션 그룹에서
친구이자 가족으로 지내온
사람들과 함께 그 행진에
참여한 것에 자부심을 느꼈습니다.
또한 게이와 레즈비언
공동체 간에, 샌프란시스코
베이 지역의 더 큰 공동체
간에 서로가 받아들임을
알게 되어 자부심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동성애자로서의
제 정체성과 몰몬으로서의
유산에 자부심을 느끼기
위해 인류애 넘치는 군중들과
함께 그곳에 참여한 것에
긍지를 느꼈습니다.
제 힘의
최대 원천을 저는 교회의
유산에서 찾습니다. 어린 소년으로서
하나님께서 인도해주시기를
직접 간구한 요셉 스미스의
모범에서 저는 영적 인도를
구합니다. 때로 엄청난
좌절을 느끼게도 하는 후기성도들로부터도
제가 지금 아는 것보다 더
나은 모범을 찾습니다.
저는 성도들 내에 정직과,
기독교적 사랑과 박애,
이해, 지성과, 그리고 선한 의지의 광대한 축적이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저는 경전에서,
특히 몰몬경에서 편안함과
깨달음을 얻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몰몬경의 힘이 제게 가장
명확한 부분은, 복음의
중심 메시지를 가장 아름답고
분명하게 정의내리는 특별한
구절입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쉽게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간악함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진리와 더불어
기뻐하며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형제들아, 만일 너희에게
사랑이 없을진대 너희는
헛된 것이라. 사랑이
결코 실족하지 아니함이라.
그러므로 모든 것 중에
으뜸이 되는 사랑을 좇으라.
모든 것이 실족하되,
사랑은 그리스도의
참된 사랑이라 영원히 참을
것이요, 누구든지
마지막 날에 사랑을 지닌
것으로 인정을 받는 자에게
모든 것이 잘 되리로다."
(모로나이서 7장:45-47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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